1944년 겨울,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누가 봐도 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아무도 예상 못 한 대반격을 준비했다.


무대는 아르덴 숲이었다. 4년 전 프랑스를 무너뜨릴 때 독일 전차가 뚫고 나온 바로 그 숲. 히틀러는 이곳에서 한 번 더 기적을 노렸다. 연합군 전선의 한복판을 뚫고 내달려, 보급항인 안트베르펜까지 단숨에 밀어붙인다는 도박이었다.


[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아르덴 반격 지도>


작전은 철저한 기습으로 시작됐다. 1944년 12월 16일, 짙은 안개와 눈보라를 틈타 독일 기갑부대가 방심하던 연합군 전선을 강타했다.


날씨가 독일 편이었다. 짙은 안개가 하늘을 덮어, 연합군이 자랑하는 압도적 공군력이 발이 묶인 것이다. 앞서 여러 편에서 봤듯 하늘을 지배한 연합군 항공대가, 이 며칠간은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선 가운데가 크게 밀리며 독일군이 만든 돌출부의 모양이, 마치 불룩 튀어나온 혹 같다 하여 이 전투는 '벌지(불룩한 부분) 전투'라 불리게 됐다.


[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2)

<눈 덮인 숲의 독일 전차>


혼란을 키운 건 특수부대였다. 독일은 영어에 능한 병사들에게 미군 군복을 입히고 노획한 미군 차량에 태워, 후방을 휘젓고 다니게 했다. 표지판을 바꾸고 헛소문을 퍼뜨려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탓에 후방에서는 서로를 의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진짜 미군인지 확인하려고, 미국인만 알 법한 야구나 영화 이야기를 묻는 검문이 곳곳에서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습의 절정에서 독일군은 교통 요지 바스토뉴를 포위했다. 이곳을 지키던 미군에게 독일이 항복을 권하자, 미군 지휘관 매콜리프는 단호히 거절한다.


[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3)[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4)[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5)

<포위된 바스토뉴>


포위된 바스토뉴의 미군은 악착같이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날씨가 바뀌었다.


하늘이 개자마자 상황이 뒤집혔다. 며칠간 갇혀 있던 연합군 항공대가 쏟아져 나와, 좁은 눈길에 늘어선 독일 기갑 행렬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앞서 본 P-47 같은 전폭기들이 독일 전차와 보급 차량을 불태웠다.


여기에 독일군은 애초부터 연료가 부족했다. 애초 계획 자체가 진격 도중 연합군의 연료 창고를 빼앗아 쓴다는 무리한 전제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연료가 떨어진 독일 전차들이 길가에 버려지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지상전 08] 안개 속의 벌지 전투 (6)

<버려진 독일 전차>


결국 벌지 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독일은 아껴둔 마지막 기갑 예비대와 숙련병을 이 도박에 쏟아붓고 모두 잃었다. 반격은커녕, 앞으로 방어할 힘마저 스스로 소진한 꼴이었다.


벌지는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벌인 최후의 대공세였다. 안개 속 기습은 잠깐 성공했지만, 하늘이 개고 연료가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제공권과 보급 없이 감행한 도박이 어떻게 끝나는가. 그 답을, 독일은 아르덴의 눈밭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4년 전 기적을 일으킨 바로 그 숲에서, 이번엔 마지막 힘을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