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군 폭격기가 거의 두 동강 난 채로 기지에 돌아왔다. 꼬리가 떨어지기 직전이었고, 네 개의 엔진 중 둘이 멈췄으며, 동체 옆구리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 거대한 비행기는 끝내 활주로에 내려앉아 승무원들을 살려 돌아왔다.
이런 일화를 셀 수 없이 남긴 비행기가 미국의 B-17, 별명 그대로 '하늘의 요새'였다.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1_a31270.webp)
<B-17 폭격기>
별명의 근거는 무장이었다. B-17은 12.7mm 중기관총을 무려 열세 정이나 사방에 둘렀다. 기수, 꼬리, 등, 배, 그리고 동체 아래 매달린 '볼 터렛'이라는 회전 총탑까지 — 어느 방향에서 적기가 접근하든 기관총 여러 정이 동시에 불을 뿜도록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볼 터렛은 악명이 높았다. 동체 배 아래에 매달린 공 모양 총탑으로, 사수는 그 좁은 구체 안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적기를 쐈다. 체구가 작은 병사만 들어갈 수 있었고, 한 번 들어가면 비행 내내 갇혀 있어야 했다. 비좁고 외롭고 위험한, 폭격기에서 가장 들어가기 싫은 자리였다.
네 개의 엔진도 생존의 비결이었다. 한두 개가 멈춰도 나머지로 비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엄청난 손상을 입고도 승무원을 태우고 돌아오는 그 끈질김이, '요새'라는 별명의 진짜 이유였다.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2)](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2_bad100.webp)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3)](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3_dbaa5c.webp)
<B-17의 기관총좌와 볼 터렛>
미국은 이 무장을 믿고 독특한 교리를 밀었다. 대낮에, 높은 고도에서, 정밀하게 목표만 때린다는 '주간 정밀 폭격'이었다. 밤에 도시를 통째로 때리던 영국과는 정반대 노선이었다.
핵심은 상자형 대형이었다. 폭격기 수십 대가 위아래로 촘촘히 겹쳐 날면, 그 수백 정의 기관총이 만들어내는 탄막이 적 전투기를 막아낸다는 계산이었다. 이론상 폭격기 편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요새인 셈이었다. 호위 전투기 없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여기서 나왔다.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4)](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4_1d2da7.webp)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5)](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5_03165d.webp)
<상자형 대형으로 비행하는 B-17 편대>
그러나 현실은 그 자신감을 잔혹하게 깨뜨렸다. 1943년, 독일 깊숙한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을 노린 두 차례의 폭격이 분수령이었다. 볼베어링은 모든 기계의 핵심 부품이라, 이걸 끊으면 독일 군수 생산 전체가 마비된다는 노림수였다.
특히 1943년 10월 14일, 훗날 '검은 목요일'로 불린 2차 슈바인푸르트 공습이 처참했다. 출격한 폭격기 가운데 60대가 격추됐고, 돌아온 기체 상당수도 다시 뜨지 못할 만큼 망가졌다. 하루 만에 한 부대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다.
원인은 분명했다. 호위 전투기가 연료 때문에 독일 국경 부근에서 돌아가야 했고, 그 너머의 빈 구간에서 독일 전투기들이 기다렸다. 그들은 B-17의 약점인 정면으로 정통으로 달려들거나, 사정거리 밖에서 로켓을 쏘아 대형을 흩뜨린 뒤 낙오기를 사냥했다. 수백 정의 기관총이 만든다는 탄막도, 약점을 아는 적 앞에서는 생각만큼 촘촘하지 않았다.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6)](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8_502880.webp)
<독일 상공의 B-17>
이 피의 교훈이 결정적인 변화를 낳았다. 폭격기 자체의 화력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베를린까지 끝까지 따라붙는 장거리 호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앞서 본 무스탕이었다. 1944년 호위 무스탕이 폭격기 곁을 목표까지 끝까지 지키면서, 비로소 B-17의 주간 폭격은 제 궤도에 올랐다. 호위기가 오히려 독일 전투기를 사냥하기 시작하자, 독일의 공장과 연료 시설은 차근차근 무너져 내렸다.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7)](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6_99a74a.webp)
![[고전무기 전투기 09] 하늘의 요새, B-17 (8)](https://img.thenullpage.com/posts/4456/4456_7_1ad18b.webp)
<피격 손상을 입고 귀환하는 B-17>
B-17에는 전설적인 기체들의 이야기도 남았다. 정해진 25회 출격을 처음으로 채우고 살아 돌아온 '멤피스 벨'이 대표적이다. 한 번 출격할 때마다 격추될 확률을 생각하면 25회를 모두 채우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고, 그래서 이 기체와 승무원은 "끝까지 버티면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 됐다.
B-17의 이야기에는 용기와 끈질김이 가득하다. 동시에, 호위 없는 폭격기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수많은 젊은 승무원이 그 차갑고 산소도 희박한 고공에서 목숨을 걸었고, '하늘의 요새'라는 이름 뒤에는 그 무게를 견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