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연합군 조종사들은 한 가지 금기를 들었다. "일본 전투기와는 절대 선회 공중전을 하지 마라."
그 전투기가 제로센이었다. 등장 초기, 제로센은 사실상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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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센 전투기>
제로센의 무기는 압도적인 선회력과 긴 항속거리였다. 가볍고 날렵해서 어떤 적기보다 빠르게 돌았고, 멀리까지 날아가 싸울 수 있었다.
이 항속거리가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 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대만 기지에서 출격한 제로센으로 필리핀의 미군 비행장을 때렸다. 너무 멀어 안전하다고 믿었던 미군은, 그 거리를 날아온 제로센에 항공기 상당수를 지상에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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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센의 측면>
이름에 얽힌 사연도 있다. 제로센의 '제로'는 일본 황기 2600년, 즉 1940년에 제식 채용됐다 해서 '영(零)식'으로 불린 데서 왔다.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집념도 유명하다. 1g이라도 줄이려고 기체 곳곳에 구멍을 뚫어 무게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제로센은 '가벼움'에 모든 것을 건 전투기였다.
1941년 진주만을 시작으로, 제로센은 태평양을 휩쓸었다. 필리핀, 다윈 공습, 인도양 작전까지 가는 곳마다 연합군기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한동안 하늘은 완전히 일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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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회 기동 중인 제로센>
그러나 이 강함에는 숨겨진 대가가 있었다. 가벼움을 얻기 위해, 제로센은 지켜야 할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
조종사를 보호할 방탄판도, 총탄을 맞아도 새지 않는 연료탱크도 없었다. 그래서 한 번 제대로 얻어맞으면, 제로센은 너무 쉽게 불타거나 터졌다.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선 "기관총 한 번 스치면 라이터처럼 불붙는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전환점은 우연한 사고에서 왔다. 1942년 6월, 알류샨 열도 아쿠탄 섬에 제로센 한 대가 거의 멀쩡한 채로 불시착했다. 조종사는 사망했지만 기체는 온전했다.
미군은 이 '아쿠탄 제로'를 수거해 완벽히 복원한 뒤, 직접 띄워가며 모든 성능을 낱낱이 파헤쳤다. 제로센의 강점과 약점이 통째로 적의 손에 넘어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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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돼 분석된 아쿠탄 제로>
여기서 나온 해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새 전술이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 조종사 존 새치가 고안한, 두 대가 짝을 지어 서로의 꼬리를 지키는 '새치 위브' 전법이 제로센의 선회 우위를 무력화했다.
다른 하나는 새 전투기였다. 더 튼튼하고 강력한 헬캣 같은 미국 전투기들이, 제로센과 빙빙 도는 대신 위에서 빠르게 내리꽂아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격추했다.
문제는 제로센이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벼움이 곧 정체성이었던 탓에, 방탄을 더하면 그 장점이 사라졌다. 일본은 끝내 제로센을 대체할 차세대 전투기를 제때 내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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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놓인 후기 제로센>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그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본 항공대가 일방적으로 격추당한 이 공중전을, 미군 조종사들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 불렀다. 사냥하듯 손쉽게 떨어뜨렸다는 뜻이었다.
끝내 제로센은 1944년 10월 레이테 해전부터 가장 비극적인 임무에 동원됐다. 폭탄을 안고 적함에 그대로 부딪치는 자살 공격, 가미카제였다. 한때 하늘을 지배했던 명품 전투기가, 마지막엔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된 것이다.
제로센은 공격을 위해 방어를 모두 버린 전투기였다. 그 선택은 초반의 무적을 만들었고, 동시에 후반의 관짝을 예약했다.
가벼움에 모든 것을 건 도박. 그 도박이 제로센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끝을 동시에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