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의 매력을 흔히 속도와 화력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 둘 다 변변찮은데도 끝까지 살아남은 전차가 있다.
영국의 처칠 보병전차다. 이름은 그 처칠 총리에서 따왔다.
![[고전 무기열전 전차 09] 느려터졌는데 끝까지 살아남은 처칠](https://img.thenullpage.com/posts/4443/4443_1_86b9e8.webp)
![[고전 무기열전 전차 09] 느려터졌는데 끝까지 살아남은 처칠 (2)](https://img.thenullpage.com/posts/4443/4443_2_a89290.webp)
<처칠 보병전차>
처칠은 빨랐던 적이 없다. 보병과 발맞춰 천천히 전진하며 그들을 보호하는 게 임무였기 때문이다.
대신 장갑이 두툼했고, 험한 지형을 기어오르는 능력이 남달랐다. 다른 전차가 포기하는 가파른 비탈이나 진창을, 처칠은 느릿느릿 넘어갔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급하게 만들어진 초기형은 고장이 잦아, 한때는 "실패작"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퇴역이 거론됐다.
그 오명을 뒤집은 것이 1943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이었다.
이곳에서 처칠 한 대가, 전차가 절대 못 오른다던 가파른 고지를 기어올라 독일군 뒤를 쳤다. 이 일은 영국군 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고, "처칠은 산을 오른다"는 평판이 여기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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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지형을 오르는 처칠>
진짜 가치가 드러난 건 1944년 노르망디 이후였다. 처칠의 두껍고 넉넉한 차체가, 온갖 특수 임무용으로 변신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것이다.
영국은 이 차체를 바탕으로 별난 전차들을 잔뜩 만들었다. 흔히 "호바트의 괴짜들"이라 불린 차량들이다.
화염을 내뿜는 '크로커다일', 장애물에 거대한 폭약을 박아 넣는 공병 전차, 참호 위에 다리를 놓아주는 전차까지. 처칠은 이 기묘한 군단의 바탕이 되어, 상륙 해변의 까다로운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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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을 내뿜는 처칠 '크로커다일'>
처칠의 미덕은 끈질김이었다. 한 번 신뢰를 얻자 영국군은 이 굼뜬 전차를 끝까지 곁에 뒀다.
심지어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처칠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진창과 능선에서도, 이 느리고 두꺼운 전차가 다시 한번 제 몫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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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전시된 처칠>
처칠은 화려한 전차가 아니었다. 느리고, 투박하고,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두껍고 끈질겼으며, 어디든 기어올라 끝까지 살아남았다. 화려한 독일 고양이들이 하나둘 멈춰 서는 동안, 이 굼뜬 전차는 묵묵히 전쟁의 끝을, 그리고 그 너머까지 보았다.